한겨레“남성 ‘불행의 공동체’ 해체할 언어는 페미니즘뿐” [.txt]

1년에 180회 성평등 교육하는 이한씨

“아이들 공격적 질문, 알아가는 과정”

페미니즘, ‘불행한 남성성’ 해석할 언어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성평등 교육 활동가 이한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성평등 교육 활동가 이한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여기, 이 사람


“선생님도 페미예요? 동덕여대 어떻게 생각하세요?”(고교 남학생) “뭔 말만 하면 딸이 화를 내는데, 어떻게 하면 안 싸울 수 있나요?”(50대 양육자)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가족들이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요.”(70대 노인)

성평등 교육 활동가 이한(34)씨가 듣는 질문이자 하소연이다. 흔치 않은 남성 성평등 강사인 그는 1년(2024)에 180여회 강단에 선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여느 트로트 가수 못지않은 스케줄을 직접 운전하며 소화한다. 청중은 초등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딸 키우는 아빠부터 ‘별 단’ 장군까지 다양하다.

“군부대는 강연장에 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꼭 가려고 해요. 남성들만 모인 집단이어서 여성 성평등 강사분들은 좀 어려워하기도 하고,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운동(이하 남·함·페)을 하는데 군부대를 빼먹으면 안 되잖아요.(웃음)”

남성과 페미니즘하기. 그가 하는 여러 활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가 여느 때보다 거센 시기,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소개하고, 남성들의 고통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해석하며,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적 실천을 함께하자고 독려하는 활동을 한다. 최근에는 책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이씨를 만났다.


― 어쩌다 페미니스트가 됐나요?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2016년, 학교에서 만난 페미니스트 친구를 따라 강남역 추모공간에 갔어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왜 그 사건이 ‘여성혐오’인지, 왜 이토록 많은 여성이 분노하는지 충분히 공감하지 못해서 오히려 당혹스럽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죠. 하지만 이 경험이 흔히 말하는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아니에요.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한순간에 변할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해요.이후 페미니즘을 더 알고 싶어서 여러 모임에 참여했는데, 강의가 늦게 끝나자 여성들이 택시를 타면서 서로 차 번호판을 사진 찍어 공유하더라고요. 학창시절 ‘바바리맨’ 한 번 안 본 여성도 없었고요. ‘아, 여성들이 겪는 게 이런 거구나’ 점점 더 실감하게 됐어요.

그렇게 알아가기 시작한 페미니즘은 도통 이해할 수 없던 남성성과 남성문화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어줬어요. 아직도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남성들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을 기억해요. ‘남자 셋만 모이면 위계가 생겼’고, 저는 위계의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어요. 위계 구조 속 우두머리는 자리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고, 바닥에 있는 이들은 낙인과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떨죠. 위계 속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이런 공고한 위계 구조에 균열을 내자는 게 페미니즘의 지향이라고 생각해요.

매년 성범죄 가해 청소년 재범 방지 교육을 하는데, 99.9%가 남성이에요. 이들에게 가르치는 강의 제목은 ‘남성성과 남성문화’예요. 흔히 성범죄를 성욕 때문에 저지른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관계없다고 봐요. 오히려 피해자를 더 가학적으로 ‘능욕’할수록 남성연대 내에서 더 인정받고 승인받는 위계 구조가 본질적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를 가해 청소년에게 해줬더니 그러더라고요. ‘이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 같다’고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이한 지음, 동아시아, 1만7000원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이한 지음, 동아시아, 1만7000원


― 교실 백래시도 극심할 것 같은데요.

“저는 정치인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하고, 성평등 교육 예산이 삭감되는 건 명백한 백래시지만, 교실 속 백래시는 백래시라고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조금만 대화를 나눠도 아이들의 눈빛이 바뀌는 게 보이거든요. 아이들의 공격적인 질문은 백래시라기보다는 페미니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강의를 가면 아이들이 하는 질문이 정해져 있어요. ‘쌤, 페미예요?’ ‘동덕여대 사태 어떻게 생각해요?’ ‘성매매 왜 하면 안 되나요?’ ‘여성가족부, 여경, 여군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같은 거예요. 그러면 저는 차근차근 되물으며 설명을 이어가요. “페미니즘이 어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정보는 어디서 들었어요?” 동덕여대 사태를 설명할 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예시로 들며 운동의 스펙트럼과, 맥락을 삭제한 채 내려지는 평가가 왜 합당하지 않은지를 말해주고, 성매매 관련해서는 ‘피를 팔아도 될까요?’라고 재질문을 던지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거래해서는 안 되는 것들과 ‘인권’의 개념을 설명해요. ‘저는 피 팔고 싶은데요?’라고 장난스레 되묻는 친구도 당연히 있어요. 그러면 다시 물어요. “부모님이 판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이렇게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마지막엔 이런 말을 들어요. ‘선생님, 다음에 또 오시면 안 되나요?’

강연 다니다 보면, 남성 청(소)년이 페미니즘에 대해 가지는 반감의 골은 깊지만,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도가 높지 않다는 걸 실감해요.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오해하는 게 당연하죠. 그럼에도 이들을 어리석은 집단으로 매도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저 타자화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과 다름 없지 않을까요? 남성 청소년들을 만날수록 이들에게 롤모델이 없다는 생각도 자주 해요. 논리도 중요하지만,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도 중요하거든요. 페미니즘을 접하고 행복해진 남성 어른의 모습이 더 많이 보여져야 한다고 봐요.”


―페미니즘을 접하고 더 행복해졌다고 느끼나요?

“당연하죠.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 때문에 ‘힘들다’ ‘아프다’ 같은 표현을 하지 못했어요. 친구에게 위로와 돌봄을 받고 싶지만 이런 욕구는 좌절되곤 했어요. 애인과 이별해서 위로받고 싶지만, 남자들 사이에선 ‘이번엔 오래 갔네’ ‘야, 우냐?’ 같은 면박과 조롱만 돌아오기 일쑤였으니까요. 페미니즘을 알고, 페미니즘을 함께 알아가는 남성들을 알아가면서 삶이 달라졌어요. ‘삶의 해상도가 높아졌다’고 할까요. 페미니즘은 우리 각자가 가진 특성과 생각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거 같아요. 이전 삶의 방식은 한마디로 ‘극기’였어요. ‘남자라면 꾹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이 삶을 지배했기에, ‘낮은 픽셀’ 같던 삶이었어요. 페미니즘을 알아가면서 돌봄, 관계, 예쁜 것들이 삶에 들어왔어요. 나와 내 주변 사람을 돌보는 것, ‘힘들다’ ‘섭섭하다’ 같은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일들이 삶의 채도를 높여줬어요. 남·함·페 친구들은 아프다고 하면 약을 사다 주고, 가끔은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줄 정도로 돌봄을 실천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요. ‘이성애 아니면 0’이던 여성과의 협소한 관계도 훨씬 풍성해졌어요.”


―이화여대 폭동 등의 사태로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남성들이 ‘극혐’하는 페미니즘의 언어로, 이 남성성에 균열을 내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어요.

“오히려 페미니즘이 아니면 대안이 있는지 되묻고 싶어요. 경제의 논리가, 기존의 가부장제의 언어가 이미 ‘불행의 공동체’로 똘똘 뭉쳐 냉소와 체념으로 서로를 결박하고, 사회를 협박하는 남성연대를 해체할 수 있을까요?”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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