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소 정기연재
꼭 여자 친구가 아니어도 좋아
by 공삼
🔸26화 <꼭 여자 친구가 아니어도 좋아> by 공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앞으로 연재될 26화 ~ 30화는 연말을 맞이하는 남함페 5인의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upsplash
올해도 너희랑 보내
크리스마스가 오는 12월, 남자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연말 혹은 크리스마스에 누구와 보내는가. 이 주제를 꺼낸 친구는 두 부류로 나뉜다. 자신이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할 것인지 자랑하고 싶어 특별한 연말 계획을 얘기하는 쪽과 연말에 만날 이성이 없으니 소개해달라는 쪽이있다. 그리고 떠드는 이야기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술잔을 비우는 나머지가 있다.
자연스럽게 이성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간다. 이성연애를 하고 있거나 경험이 많은 친구가 발언권을 가진 채 이성을 만나지 않거나 만날 기회가 없는 친구들에게 여러 조언(?)을 쏟아낸다. ‘일단 살 좀 빼자’,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면 만나는 건 걱정하지마 내가 소개해줄게’,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을 많이 만나보는 게 중요해.’ 개인의 섹슈얼리티와 상관없이 이성 연애는 언젠가 달성해야 되는 과제가 되어 우리에게 스며든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이성연애)를 향해 달려가는 것 이를 통해 우정을 확인하고 연대를 공고히 다져간다.
나 또한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크리스마스 때 했던 소개팅이나 데이트를 하며 연말의 외로움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고 했다. 허나 이런 만남을 가지고 나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꼭 겨울방학 때 밀린 일기를 한 번에 쓰는 것처럼, 연말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관계'라는 밀린 숙제를 하기에 바빴다.
@upsplash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한 ‘노력’
이성애 연애를 갈망하는 혹은 갈망해야 되는 환경에서 '나'는 이성애 연애를 하고 싶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했다.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하고 그 기회를 그냥 흘리면 안 되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X가 데이트를 주선해줬던 일이 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자친구랑 보내야지! 누구랑 보내고 싶어?” 라고 묻는 X에게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이건 괜찮은 게 아니라고 X는 말했다. X의 집요함과 나도 왠지 기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평소 호감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생각해본 적 없는 A를 얘기했다. "너는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X는 며칠 뒤 그 친구와 식사자리를 마련했다며 다음의 일은 너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테니 잘 해보라는 식의 이야기를 건냈다. A와 만남을 가졌다. X가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A의 당황스러움이 보였다. "우리 둘만 보는거예요?" "응 X는 바쁜 일이 있어서 식사 자리는 참석하기 어렵다고 하시네" A와 짧은 만남을 끝내고 나는 A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관계를 더 이어가기 위해 메신저로 연락을 취했다. 의례적인 답변이 오고 갔고 그녀의 불편함이 보였지만 노력으로 극복해야 될 과제처럼 생각했다.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시간되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저 시간이 안 될 거 같은데요."
"그래도 잠깐이면 되는데 내가 너한테 갈게."
"제가 00에 있는데 오실 수 있을까요?"
목적지도 불확실한 지하철을 타며 이게 맞는지 자문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A의 만남을 원했는지? 나의 행동에 A는 어떤 생각을 할지? A가 '그만'이라고 외치는 거 같은데 '노력'이란 이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무시하고 쫓는 건 아닌지? 이후 X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나는 잘 안되었다고 얘기했다. "좀 더 노력해보지 그랬어?" 라는 말에 "아니 이만하면 할 만큼 한 거 같아요" 라고 답했다.
이성애 연애의 또 다른 모습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특정 시공간에서 이상적인 남성성이라고 동의되고, 남성 중심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남성성을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한국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요? 남성 중심적 신자유주의 사회인 한국에서는 전문직 내지는 정규직으로서의 삶의 양식(의사, 판사,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 고위 공무원, 대기업 화이트칼라, 군필, 생계부양자, 재생산 노동 회피)을 유지할 수 있는 남성이 표준적 남성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두려운 사랑」 김신현경, 50p
남자들에게 이성애 연애를 한다는 건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 외에도 다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김신현경 선생은 이 무언가를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구조에서 지배적 형태로 수용되는 남성성은 이성애 연애를 하며, 안정적인 경제적 생활을 바탕으로 바깥 일을 하는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들은 이 이상적인 모습을 원하며 따라하고 노력한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구애의 영역에서는 여자친구가 있는 남성인 '나'의 모습을 획득하기 위해 상대방의 감정을 신경쓰기보다 '노력'을 통해 나의 빈자리를 채워야한다. 여성이 없는 남성은 이상적인 남성이 아니며, 이상적인 남성이 아닌 '나'는 '제대로 된 남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을 기준으로 한 표준적 남성을 달성하는 건 여러 조건을 갖춰야만 가능하다. 이제는 익숙한 ‘루저'라는 표현처럼 신체적 모습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 외모까지 갖출 때 ‘표준적 남성’을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도생의 시대'에 표준적 남성은 따라할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허상을 쫓거나 그것이 안 될 때 자신을 비하하며, 못남을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풀어내는 경우가 있다.
“왜 비웃었어? 저번 날에 너희 학교 앞에서 너 내 옆에 지나가면서 비웃었지? 그래 사람이 사귀다 헤어질 수 있어 뭐 결혼했다 이혼도 하는데 머 근데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기본적으로 예의가 있는 거야 안 그래? 하긴 너 나랑 사귀면서도 속으로 나 비웃었지? 너보다 후진 대학 다닌다고 내가 아무리 뭐 같아도 그럼 안 되지 네가 뭔데 날 비웃어? 어!!!”
「청춘시대(2016)」 대사 중
드라마 속 등장인물 ‘예은'과 ‘두영'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로 등장한다. 그러나 ‘예은'이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학교에 다니는 걸 알게된 ‘두영'은 자신보다 학벌이 높은 여자친구에게 자격지심을 느껴 데이트폭력을 저지른다. 이처럼 남성들 간의 격차가 심해지는 오늘날, 표준적 남성이 되지 못해 자격지심을 느끼는 일부 남성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여성보다 낮다고 느껴질 때 긴장을 느끼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통해 긴장감을 해소하려한다.
A를 비롯한 크리스마스 혹은 연말에 만났던 인연들이 떠오른다. 나보다 학력이 높거나 사회 경험이 뛰어난 그녀들을 보며 느꼈던 긴장에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내가 원했던만큼 따라와주지 않는 그녀들에게 서운해하며, 그 이상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뜨기에 바빴다. 연말과 크리스마스에 내가 원했던 건 평등한 관계의 사랑이 아닌, 외모와 남성을 보조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이 아니었을까.
@upsplash
따뜻한 겨울을 기약하며
몇 년 전 꿈을 응원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던 공동체에서 동해로 겨울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나이 성별 가치관은 다르지만 눈썰매를 타고 겨울 항구에서 노래를 부르며 함께 별을 구경했다. 특별한 이벤트도, 같이 보낸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들과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만나 서로를 알아갔다. 그때를 되돌아보며 나란 사람이 친밀한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꼭 여자친구가 아니어도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배웠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상상을 해본다. 연말에 기대하는 친밀감을 꼭 '연인'으로 정할 필요가 있을까.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쫓는 남자가 아닌, 외로움을 달래줄 연애 대상으로서 여자가 아닌,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만남을, 꼭 만남이 아니어도 다른 무언가로 채울 수 있는 겨울을 보내고 싶다.
“저는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성에 대해 배우고 더 알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더 나은 상대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립적이면서 성찰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연애에서도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의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여성성과 남성성을 습득해왔고, 때로는 저항해왔으며, 그 결과 친밀한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연애를 하면서 이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되지요. 그러니 한번의 연애를 통해 완벽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공부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낯선 타인과 친구가 된다는 마음으로 좀 더 가볍게, 차근차근 연애에 접근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이토록 두려운 사랑」 김신현경, 52~53p
얼룩소 정기연재
꼭 여자 친구가 아니어도 좋아
by 공삼
🔸26화 <꼭 여자 친구가 아니어도 좋아> by 공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앞으로 연재될 26화 ~ 30화는 연말을 맞이하는 남함페 5인의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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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너희랑 보내
크리스마스가 오는 12월, 남자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연말 혹은 크리스마스에 누구와 보내는가. 이 주제를 꺼낸 친구는 두 부류로 나뉜다. 자신이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할 것인지 자랑하고 싶어 특별한 연말 계획을 얘기하는 쪽과 연말에 만날 이성이 없으니 소개해달라는 쪽이있다. 그리고 떠드는 이야기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술잔을 비우는 나머지가 있다.
자연스럽게 이성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간다. 이성연애를 하고 있거나 경험이 많은 친구가 발언권을 가진 채 이성을 만나지 않거나 만날 기회가 없는 친구들에게 여러 조언(?)을 쏟아낸다. ‘일단 살 좀 빼자’,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면 만나는 건 걱정하지마 내가 소개해줄게’,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을 많이 만나보는 게 중요해.’ 개인의 섹슈얼리티와 상관없이 이성 연애는 언젠가 달성해야 되는 과제가 되어 우리에게 스며든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이성연애)를 향해 달려가는 것 이를 통해 우정을 확인하고 연대를 공고히 다져간다.
나 또한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크리스마스 때 했던 소개팅이나 데이트를 하며 연말의 외로움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고 했다. 허나 이런 만남을 가지고 나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꼭 겨울방학 때 밀린 일기를 한 번에 쓰는 것처럼, 연말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관계'라는 밀린 숙제를 하기에 바빴다.
@upsplash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한 ‘노력’
이성애 연애를 갈망하는 혹은 갈망해야 되는 환경에서 '나'는 이성애 연애를 하고 싶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했다.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하고 그 기회를 그냥 흘리면 안 되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X가 데이트를 주선해줬던 일이 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자친구랑 보내야지! 누구랑 보내고 싶어?” 라고 묻는 X에게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이건 괜찮은 게 아니라고 X는 말했다. X의 집요함과 나도 왠지 기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평소 호감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생각해본 적 없는 A를 얘기했다. "너는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X는 며칠 뒤 그 친구와 식사자리를 마련했다며 다음의 일은 너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테니 잘 해보라는 식의 이야기를 건냈다. A와 만남을 가졌다. X가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A의 당황스러움이 보였다. "우리 둘만 보는거예요?" "응 X는 바쁜 일이 있어서 식사 자리는 참석하기 어렵다고 하시네" A와 짧은 만남을 끝내고 나는 A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관계를 더 이어가기 위해 메신저로 연락을 취했다. 의례적인 답변이 오고 갔고 그녀의 불편함이 보였지만 노력으로 극복해야 될 과제처럼 생각했다.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시간되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저 시간이 안 될 거 같은데요."
"그래도 잠깐이면 되는데 내가 너한테 갈게."
"제가 00에 있는데 오실 수 있을까요?"
목적지도 불확실한 지하철을 타며 이게 맞는지 자문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A의 만남을 원했는지? 나의 행동에 A는 어떤 생각을 할지? A가 '그만'이라고 외치는 거 같은데 '노력'이란 이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무시하고 쫓는 건 아닌지? 이후 X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나는 잘 안되었다고 얘기했다. "좀 더 노력해보지 그랬어?" 라는 말에 "아니 이만하면 할 만큼 한 거 같아요" 라고 답했다.
이성애 연애의 또 다른 모습
남자들에게 이성애 연애를 한다는 건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 외에도 다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김신현경 선생은 이 무언가를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구조에서 지배적 형태로 수용되는 남성성은 이성애 연애를 하며, 안정적인 경제적 생활을 바탕으로 바깥 일을 하는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들은 이 이상적인 모습을 원하며 따라하고 노력한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구애의 영역에서는 여자친구가 있는 남성인 '나'의 모습을 획득하기 위해 상대방의 감정을 신경쓰기보다 '노력'을 통해 나의 빈자리를 채워야한다. 여성이 없는 남성은 이상적인 남성이 아니며, 이상적인 남성이 아닌 '나'는 '제대로 된 남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을 기준으로 한 표준적 남성을 달성하는 건 여러 조건을 갖춰야만 가능하다. 이제는 익숙한 ‘루저'라는 표현처럼 신체적 모습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 외모까지 갖출 때 ‘표준적 남성’을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도생의 시대'에 표준적 남성은 따라할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허상을 쫓거나 그것이 안 될 때 자신을 비하하며, 못남을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풀어내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 ‘예은'과 ‘두영'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로 등장한다. 그러나 ‘예은'이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학교에 다니는 걸 알게된 ‘두영'은 자신보다 학벌이 높은 여자친구에게 자격지심을 느껴 데이트폭력을 저지른다. 이처럼 남성들 간의 격차가 심해지는 오늘날, 표준적 남성이 되지 못해 자격지심을 느끼는 일부 남성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여성보다 낮다고 느껴질 때 긴장을 느끼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통해 긴장감을 해소하려한다.
A를 비롯한 크리스마스 혹은 연말에 만났던 인연들이 떠오른다. 나보다 학력이 높거나 사회 경험이 뛰어난 그녀들을 보며 느꼈던 긴장에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내가 원했던만큼 따라와주지 않는 그녀들에게 서운해하며, 그 이상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뜨기에 바빴다. 연말과 크리스마스에 내가 원했던 건 평등한 관계의 사랑이 아닌, 외모와 남성을 보조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이 아니었을까.
@upsplash
따뜻한 겨울을 기약하며
몇 년 전 꿈을 응원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던 공동체에서 동해로 겨울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나이 성별 가치관은 다르지만 눈썰매를 타고 겨울 항구에서 노래를 부르며 함께 별을 구경했다. 특별한 이벤트도, 같이 보낸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들과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만나 서로를 알아갔다. 그때를 되돌아보며 나란 사람이 친밀한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꼭 여자친구가 아니어도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배웠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상상을 해본다. 연말에 기대하는 친밀감을 꼭 '연인'으로 정할 필요가 있을까.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쫓는 남자가 아닌, 외로움을 달래줄 연애 대상으로서 여자가 아닌,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만남을, 꼭 만남이 아니어도 다른 무언가로 채울 수 있는 겨울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