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연구[정기연재] 남다른 새해 계획

남함페
2023-12-20

얼룩소 정기연재

남다른 새해 계획

by 연웅


🔸28화 <남다른 새해 계획> by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앞으로 연재될 26화 ~ 30화는 연말을 맞이하는 남함페 5인의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연웅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연말의 글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로 시작하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에서 ‘비슷한 이유로 행복한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대부분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가정’ 혹은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말은 안 해도 사연 하나 없는 사람 없다. 분명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헛헛한 연말을 지내고, 또 나아진 새해를 기대하며 오늘을 보낼 것이다. 지금 꺼내도 어색하지 않은 문장이다.

누군가는 문학을 시대의 거울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라 말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여전히 명징한 거울이 되어 우리를 또렷이 비추고 있다. 속담 중 “사연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있다. 또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명언이다. 모두 맥락은 비슷하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모두에게 언제나 있다는 것. 중요한 것은 저마다의 이유지, 불행 그 자체가 아니다.


@KBS1 전국노래자랑


“올해도 행복한 연말, 내년에도 행복한 새해 되세요.”

우리는 모두 행복한 연말과 새해를 바라며, 서로에게도 비슷한 인사말을 건넨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든다.

“대체 뭐가 행복한 건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신세계백화점 보도자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요즘, 서울 명동에 위치한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을 지나가다 보면 화려하게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에 들어온다. 퇴근하는 직장인,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 지나가는 학생과 어르신 누구 할 것 없이 잠시 멈춰서서 빛나는 트리를 구경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긴다. 모두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잠시나마 행복에 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감상의 순간에서는 모두가 따뜻하고 다정한 연말을 보내는 것 같다. 모두 사연 하나 없이 각자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내 마음도 주머니 속 핫팩처럼 금방 온기에 젖는다.



@MBC 무한도전


하지만 정작 주변에서 만나는 모두가 2023년을 보내며 하는 말은, “아, 뭘 했다고 벌써 연말이야.”, “아, 올해도 한 게 없네.”, “시간 너무 빠르다.” 정도다. 분명 어느 때에는 진하게 느꼈을 그 따뜻함이나 행복감을 이미 잊은 사람처럼, 모두가 자신의 ‘불행 조건’을 탐색하고 비교한다. 그러면서 2024년에는 자신이 얻고 싶은 ‘행복 목표’를 나름대로 떠올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불행 조건’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 더 나은 직장으로의 취업, 자격증과 커리어, 경제적으로 더 풍족한 삶, 더 넓은 집, 갈등 없이 화목한 가정, 적당하게 괜찮은 관계들, 남 보여주기 그럴 듯한 취미나 여가 등 두둑한 체크 리스트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줄진 않는다.

불행 조건을 제거해나가는 일이 의미 없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자신만의 체크 리스트를 갖고 불행 조건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일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체크 리스트를 채워가는 일은 분명 삶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그것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역설하고 싶을 뿐이다.


@Pixabay


가정도, 관계도, 개인도 다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모든 제각각의 불행한 이유를 제거하면 행복한 가정, 행복한 관계, 행복한 개인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봐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다. 모든 불행의 씨앗을 제거할 수 없거니와, 근원적으로 불행의 전면적인 부재가 곧 행복의 존재를 의미하진 않으니까. 행복은 불행이 없어진다고 오는 게 아니라, 행복 그 자체로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심지어는 삶의 순간 순간에서 만나고 있으면서도, 가진 행복은 외면하고 본인의 ‘불행 조건’을 제거해 어딘가에 있을 행복을 찾는 데 다들 집중하고 있을 따름이다.

결국, 그렇게 발화되고 의미되는 ‘행복’은 하나의 이상향으로써 모두가 마음 속에 품고는 살지만, 실은 각자의 불행과 결핍이 투영된 허상에 가까운 것이다. 언제 행복을 느끼냐는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잔잔하고 평화롭고 소소한 것들에 만족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는 편인데, 정작 삶에서 실천되는 액션 플랜은 ‘무한한 불행 제거’에 가까워 보인다. 우습게도 무한히 불행을 제거하고 행복을 찾아 헤매는 사람보다 그 지난한 ‘행복 찾기’를 진작에 접은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오히려 선언하고 싶다.

“우리 모두, 행복 찾는 걸 접자. 어때?”



@작은콩의 느림일기 https://brunch.co.kr/@9cc75e4bd7624ea/111


아마 내 선언 다음에 이어질 사람들의 반응은 “응, 너나 접어.” 정도의 조롱이나 “그거 실패한 사람의 자기 합리화 아냐?” 정도의 의문으로 이어질 것 같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그건 우리가 드러난 개인만 봐서 그렇다. 우리는 사회를, 세상을 봐야 한다.

지난해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의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올해 상반기 자살로 죽은 사람의 수는 6천 9백여 명으로 작년보다 8.8% 가량 늘었는데, 전체적인 자살률은 20여 년의 시간 동안 ‘OECD 국가 중 1위’라는 참담한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19세 이하 청소년 자살 사망자가 18%나 늘었다는 것이고, 노인 자살률 또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생애주기의 순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BC 무한도전


여기엔 비교와 조롱의 문화도 크게 한 몫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저울과 계산기를 들이대고 있다. 그렇게 한없이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다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조롱해도 된다는 허락’을 구한 것 마냥 타인을 깔아 뭉갠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나아가 타인에 대한 이해나 관용, 신뢰가 바닥을 쳤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서로 편을 갈라 싸우고 나와 다른 사람(틀린 사람이라 생각하며)에 대해 주어진 권리인양 차별하고 배제한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조건과 환경은 절대 타인과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도 분리되지도 않는 것임에도, 열매는 오롯이 나의 것이라 여기고 책임은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 개인에게 더 나은 개인이 될 것을 요구하며, 더 많은 성취와 지속적인 성장을 독촉한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삶 전반에 깔린 불안 위에 살며, 우울을 옆에 끼고, 고립되고 배제된 채 아둥바둥 버티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이런 세상에서 과연 개인이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가? 난 모르겠다. 난 아니라고 본다.


@X(前 트위터)


하나 가정해보자. 만약에 당신이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지던 모든 ‘불행 조건’ 제거에 성공하고, 운이 좋게도 당신이 바라던 모든 것들이 쉽게 손에 잡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정말 행복할까?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체크 리스트가 채워진다고 당신에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행복’이라는 무언가가 충만하게 다가올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아무리 네트워크를 좁히고 인간 관계를 다이어트 한다 해도, 분명 누군가와는 교류하고 연을 맺고 살 수밖에 없다. 아예 고립되면 그건 그거대로 불행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행복한 상태에 머물기 위해선,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차례로 그들이 불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불행의 조건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고, 또 내 불행 조건이 모두 제거된 상태라 해도 그들의 불행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새로운 불행 조건이 될 테니까. 실험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순전히 내 경험과 추론에 의해 도출된 아이디어 정도다. 나의 경우엔 분명 그랬다. 내가 꽤나 안온하게 지내던 시기에 나의 근심은 내 주변의 애인과 친구, 동료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위태롭던 시기에 나는 누군가의 근심이었을 거다. 

그럼 상상을 더 넓혀 내가 내 능력으로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불행 조건까지 함께 제거해 나갔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그들이 가진 다양한 서사와 정체성 그리고 인간 조건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들이 모두 얼기설기 꼬여 또 다른 관계로 나아가고 다시 복잡하게 교차한다. 그렇게 다차원의 교차로를 지나고 나면 결국 우리는 사회에 닿게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다. 불합리한 사회에선 부당한 일을 당하는 개인이 존재하고 그 개인의 불행은 결국 돌고 돌아 나의 불행 조건에 맞닿는다. 사회가 불합리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없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없었다. 사회가 나아지지 않으면 나라는 개인의 삶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MBC 무한도전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 이것은 순전히 내 아이디어다 - 앞서 선언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 각자의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을 접자. 단호히 거부하자. 그리고 내 불행 조건을 무한히 제거하는 일도 그만 두자. 그걸 비교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말자. 그럼 남은 것은 ‘타인의 행복을 찾는 일’과 ‘타인의 불행 조건을 제거하는 일’이다. 전자는 불가능에 가깝다. 내 행복도 못 찾는데 타인의 행복을 어떻게 대신 찾아줄 수 있겠는가. 마침내 나온 궁극의 방책은 결국 우리 모두 서로의 불행 조건을 제거하는 데 앞으로의 생을 쓰자는 것이다. 누군가의 불행에 함께 걱정하고 슬퍼하며 성숙한 방식으로 돕고 서로를 돌보자. 한없이 취약한 우리 서로를 다정하게 돌보자.

그래서 이제와는 남다른, 누구와도 남다른 새해 계획을 추천한다. 그것은 바로 ‘돌봄망 구성’이다. 처음부터 사회를 위해 산다는 것은 그거대로 욕심이다. 원래, 나를 둘러싼 작은 울타리가 넓어지면 사회가 되고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새로운 새해 계획은 성취나 성장 같은 게 아니었으면 한다. 새해엔 당신이 당신만의 ‘돌봄망’을 구성해보길 바란다. 당신이 어떤 불행에 허덕일 때, 위기가 찾아올 때 당신을 돌볼 사람들을 구성해놓는 것이다. 그 말은 즉슨, 당신 또한 그 돌봄망 속 누군가가 어떤 불행을 겪거나 위기를 겪을 때 그를 진심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너무 넓게 펼칠 필요도 없다. 꼭 혈연이나 지연 등에 한정되지 않아도 된다. 다정히 누군갈 돌보는 당신을 누군가가 다정히 돌보는 것, 그렇게 각자는 무한한 싸움에서 해방되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동시에 각자의 불행 조건으로부터 서로가 서로를 무한히 지켜내는 일. 그것이 행복의 공동체이자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면 무엇이 행복이겠는가. 그나마 내가 떠올린 모든 것들 중 가장 ‘행복’에 가까운 모습이다. 분명 혼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만화 치즈덕 https://pann.nate.com/talk/347813198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글에 끝에서 다시 한 번 걸작의 문장을 되새겨 보자.

<안나 카레니나>가 세계적인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아플 정도로 뚜렷한 생(生)에 대한 통찰과 함께 얼기설기 꼬인 인간 조건을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곱씹으며 처음 드는 감상은 약속된 삶은 불행의 연속이고,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들뜬 꿈일지도 모른다는 착잡함이다.

하지만 오래 곱씹으면 나오는 단물처럼, 글 속에는, 아니 삶 속에는 분명 우리를 움직이고 설레게 하고 감동을 주는 우연과 인연이, 우정과 열정이, 자유와 사랑이 도처에 있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아주 자주 있을 것이다. 분명히.

우리의 2024년을 기대하며, 애정하는 문장 꾸러미를 당신에게 선물하려 한다. 내가 사랑하는 책,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속 한 구절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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