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연구내가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장면들

남함페
2023-12-27

얼룩소 정기연재

내가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장면들

by 태환


🔸29화 <내가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정면들> by 태환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앞으로 연재될 26화 ~ 30화는 연말을 맞이하는 남함페 5인의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내가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장면들


코끝이 시려워지면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 양말을 두겹 챙겨 신고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열이 올라오는 따뜻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존다. 안내 방송에 눈을 뜨고 비몽사몽 몸을 일으킨다. 광화문 광장에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살펴본다. 삼삼오오 길을 걷는 사람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연인들은 팔짱끼고, 어린 아이는 꺄르륵 웃는다.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몸을 잔뜩 웅크린채 걸어가는 사람도 보인다.

자리를 옮긴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늘만큼은 올망졸망한 동네 카페 보다 앉는 자리가 많은 스타벅스가 더 좋다. 따뜻한 온기와 크리스마스 노래, 시끌벅적 사람들. 여기도 삼삼오오다. 두 손으로 머그컵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서로 몸을 붙이고 앉아 귓속말 나누는 이들. 주문한 커피를 받고 자리에 앉으면 그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가만히 듣다보면 어느새 앞에 놓인 커피는 반쯤 남아있다. 내가 사랑하는 크리스마스의 장면들이다.


@Pixabay


가족과 함께 보내는 연말


“연말은 가족과 함께"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각종 책, 광고, 영화, 드라마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연말 컨텐츠로 선보인다. 그만큼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 누군가 나에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연말'의 풍경을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자연스레 따뜻한 거실에 모여앉은 이들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음식을 나누어먹으며 하하호호 웃는 장면을 생각하곤 한다.

내 삶에서도 그런 장면이 자주 있었을까? 완전히 그랬다거나, 반대로 완전히 그러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따뜻하고 웃음이 넘치는 장면과 차갑고 쓸쓸함이 넘치는 장면, 현실은 그 사이인 것 같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한 해를 되돌아보는 때도 있었고, 가족 모두가 바빠서 모이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나름 괜찮았다. 엄청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실망스럽지도 않은 시간들이었다.


연초보다 뜨거운 연말의 연인들


연말, 특히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시간이다. 놀 수 있는 모든 것과 갈 수 있는 모든 장소는 빨간색 장식을 뒤집어쓰고 가격이 올라 연인들을 유혹한다. 연인간의 섹슈얼한 사랑도 이때 뜨거워진다. 12월 한달 동안 숙박 업소 가격은 몇 배로 오른다. 올라도 너무 오르는데, 예약할 수 없을만큼 인기도 동시에 오른다. 연인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건 연초보다 연말에 더 핫(hot)하다.

내 삶은 세상과 반대일 때가 많았다. 연말도 그랬다. 내 연애는 대부분 연말에 끝이 났다. 헤어짐을 위한 준비는 일찍부터 시작됐지만 정작 이별의 순간은 늦게 찾아왔다. 그래서 연말은 내게 쓸쓸함이기도 하다. 


나만의 크리스마스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각자만의 방법이 있다. 나만의 크리스마스 루틴이 있다. 아침에는 늦잠을 잔다. 평소에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는 목적도 있지만, 그냥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진다. 오전 느즈막히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파트에 살면 늘 회색벽을 마주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 아점으로 전날 사둔 빵과 새로 내린 커피를 먹으며 ‘역시 브런치가 좋아' 생각한다. 그리고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사람 구경을 한다. 서점에 갔다가 광장을 걷다가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신다. 해가 질 때쯤 조각 케익과 와인 한 병을 사서 집에 간다. 조각 케익은 반드시 초코로, 와인은 떫은 맛이 강할수록 좋다. 몸을 따뜻하게 뎁힌 후에 영화 <크리스마스 캐롤>을 튼다. 짐캐리가 목소리 더빙을 한 애니메이션 영화다. 케익과 와인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잠이 쏟아지면 침대에 눕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크리스마스에는 그 몽글몽글한 감각을 느끼며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하루를 채운다. 


@Pixabay


나는 사랑받고 싶다.


나는 왜 크리스마스 무렵의 특정한 장면들을 사랑할까? 아마 처음부터 사랑하진 않았을 거다. 여러 장면을 마주했고, 알아차렸고, 반복했고 그렇게 사랑에 빠졌을 거다. 옹기종기 모여 저녁을 나누어 먹는 가족, 손을 꼭 잡고 귓속말을 나누는 연인, 좋아하는 것들로 크리스마스 하루를 채우는 내 모습까지. 매년 연말이 다가오면 내가 왜 그 장면들과 사랑에 빠졌는지 늘 궁금해진다.

고백하건데 나는 사랑에 있어 늘 전통적인 남성의 위치에 서 있었다. 누군가를 챙기고 사랑을 나눠주는 남성성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옳다고 배웠고 평생에 걸쳐 연습해왔다. 주고받는 게 사랑인 걸 머리로는 알아도 수행해야 하는 남성의 역할에 집중해왔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사랑을 주고받는 이들의 장면을 더욱 더 찾아다니게 됐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나도 그림의 일부가 되길 바랐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 사랑이 넘치는 연말 장면 안에 나도 끼어들고 싶다. 이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는데 10년이 필요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건 모두가 알지만,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을 주는 법만 알지, 사랑을 달라고 말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내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 애정어린 말을 건네는 법은 알지만, 선물을 받고 싶고 애정어린 말을 듣고싶다고 말하는 법은 몰랐다. 내가 그런 사람인걸 깨닫고 인정하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크리스마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광화문 광장 근처의 어느 스타벅스에서 반쯤 남은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말한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고. 가족에게, 연인에게, 나 스스로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연말의 행복한 장면은 이제 그만 쫓아 다니고 내 삶에서 나만의 장면을 만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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