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연구[정기연재] 사랑, 취향 그리고 위스키

남함페
2024-01-04

얼룩소 정기연재

사랑, 취향 그리고 위스키

by 정민


🔸30화 <사랑, 취향 그리고 위스키> by 정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앞으로 연재될 26화 ~ 30화는 연말을 맞이하는 남함페 5인의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정민


싱글, 몰트, 스코치, 위스키

연말에는 위스키다. 샴페인도, 와인도, 맥주도 아닌 위스키가 좋다. 우선, 무게 잡기가 좋다. 샴페인? 너무 가볍다. 맥주? 가스가 나온다. 와인? 왠지 꼭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반면 위스키는 한 모금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기본 40도로 찌르는 알코올과 함께 바닐라, 과실향이 올라온다. 위스키는 비싸다는 인식이 있지만, 효율로 따지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가난한 나도 여기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를 준비했다. 싱글은 하나의 증류소에서 만들었다는 것, 몰트 위스키는 100% 보리로만 만든 위스키라는 뜻이고, 스코치는 스코틀랜드다. 이름부터 싱글이다. 그러니까 싱글 몰트 위스키는 혼자 즐기기 좋은 것이다. 혼자인 연말에 말이다.

연말, 위스키가 선사한 취기를 품고 ‘여기 어떠냐’ 앱을 켜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10만원 정도 하던 방이 26만원을 받는다. 이름만 호텔이지 사실 모텔에 가까운 방인데 별 세개짜리 호텔 값을 받는다. 심지어 그 가격을 내도 구하기 어렵다. 최소 한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 했으리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의 숏폼 콘텐츠에는 사랑스러운 애인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즐비하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댓글이다. 락스 한 통과 담배 한보루를 찾는 댓글이 빽빽하다. 다른 버전으로는 ‘형님은 세금 두배로 내십시오’도 있다. 웃고 넘길 일이기도 하지만, 연애를 꼭 해야만 한다는 인식에 마음이 쓰인다. 또 연애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되는 자원의 영역이 된 것 같아 복잡한 심산이다.


@유튜브 영상 "세금 두 배 내세요 #국제커플" (@bee_sangsu) 댓글


연말에 연인들, 특히 20대 연인들이 호텔로 몰리는 배경은 단지 특별한 이벤트를 선호해서만은 아니다. 섹슈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바른생각’에서 2040 남녀 1,000명으로 조사한 ‘바른생각 리포트 2023’에 따르면, 20대 연인에게서만 ‘시간/장소의 마땅치 않음’이 섹스리스 원인 중 두번째로 높게 나타났다. 치솟는 집값과 주거비 이슈로 독립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청년들을 생각해보면 쉽겠다. 한편, 2022년 인구보건복지협회의 청년의 연애, 결혼 그리고 성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65.6%의 청년이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고, 이들 중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 응답자는 절반을 넘는데(53.3%) 여유가 없어서(58.7%)였다. 이렇게 보면 연애는 정말 자원의 문제가 된다.

@바른생각 리포트 2023

@뉴시스 / 결혼정보회사 듀오 조사


연애의 물질성은 현존한다. 이상적인 짝의 모습을 숫자로 환산해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와 소득, 자산, 나이, 대학 서열, 직업 선호도 등은 모두 계량화, 서열화 가능한 영역들이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며 ‘연애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순진하기 짝이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연애는 현실 아니던가. 그리고 그 현실에 물질과 계산이 따라붙는 게 아주 이상한 현상도 아니고 말이다. 사회적 지위를 결정할 수도 있는 엄혹한 현실 앞에 나 역시 움츠러들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상태로 입이라도 우물거려야겠다. 그래서, 그게 진짜 우리가 원하는 거냐고 말이다. 아래는 영화감독 장항준씨가 방송 유퀴즈에 출연한 장면이다. 아내 김은희 작가와 관련해, 좋은 부부관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tvn 유퀴즈 방송 122회 (유튜브)


“부부라는 건 중요한 게 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티비를 봤을 때 웃는 포인트가 같아야 하고,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포인트가 같아야 해요. 웃는 포인트가 같으면 일상이 즐겁고, 울거나 분노하는 포인트가 같아야 한다는 건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가 같은 궤를 갖고 있다는 거거든요.”

(출처: 유퀴즈 122회)



진리는 단순하다고 했던가. 장항준씨의 말을 들으니 연애의 물질성에 빠진 벽돌이 무엇인지, 또 왜 나의 지난 연애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의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좋은 관계를 만드는 건, 취향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여타 사회적 조건들의 합과는 다르다. 물질적 기반들이 같은 취향을 공유할 확률을 높여줄 수는 있지만, 취향의 통할 것임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대부분의 연애는 실패하는가? 헤어짐 사유의 1순위인 성격 차이 혹은 한낮의 말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같은 일에 웃고, 같은 일에 슬퍼할 수 없었던, 같은 장르의 음악을 나누고 같은 카테고리의 책을 공유할 수 없었던, 사람 사이의 ‘결’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돌아보니, 우리 연애가 참 힘든 것이 되었다는 느낌에 젖어든다. 뭐 이렇게 갖춰야 할 것들이 많을까. 정상과 평범의 기준이 왜 이리 높을까. 한때 ‘진짜 사랑’에 집착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곧 사랑이라 믿기도 했고, 게임 같은 것이 사랑이라고 외치고 다녔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지, 참사랑은 또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좋은 관계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같이 즐거울 수 있으면 장땡이다. 연애든, 우정이든, 동거든, 결혼이든, 사랑이든 이름은 나중에 붙이기 나름이다. 반대로, 함께 해서 그리 즐거울 수 없다면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인들 좋은 것이 되긴 어려운 것이다.

이따금씩 청소년들과 연애나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한다. 그러면 대개 교실은 한바탕 난리다. 연애, 데이트, 섹스 세 가지는 청소년에게도 뜨거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청소년들에게 섹스는 언급량 자체가 많은, ‘말로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럴수록 강사는 열성적인 분위기를 받아주면서도 강의 자체는 교육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때 내가 건네는 멘트가 있다. “데이트는 2시간도 하고, 하루 종일 할 수도 있는데, 섹스는 아무리 길어도 보통 10분, 15분이면 끝나요. 그럼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본적 있나요?”이다. 물론 쉬면서 계속하겠다는 청소년도 있지만, 대체로 ‘그것이 아닌 영역’을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인지한다. 섹스(물론 섹스도 관계지만) 외에, 어떻게 만나고 잘 지낼 것인가? 비단 청소년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정민


싱글 몰트 위스키로 썰렁한 농담을 남기며 글을 시작했으니, 이제 나는 앞으로 이런 농담과 위스키를 좋아해줄 취향의 공동체를 만나면 되는 것일까. 물론 이론적으론 그렇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 관계 맺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도 지지해줄 사람을 만난다면 감사할 것이다. 하지만 넘어설 벽이 아직 남은 거 같다. 내가 연말에 위스키를 찾는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위스키가 불러일으키는 계층상승의 감각 때문이다. 나는 위스키를 구매하며 녹진한 맛과 이완되는 몸을 바라지만, 사실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는 마음, 어엿한 성인 남자가 되어 쓸만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위안을 바라는 것도 같다.

이대로라면 취향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실패할 것이다. 취향보다 이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파악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12년 된 위스키는 18년 된 위스키 앞에서 작아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물질성이다. 또 위스키를 좀 마셔본 사람 앞에서는 우물쭈물, 위스키가 처음인 사람 앞에서는 우쭐거릴 것이다. 내가 ‘입문’ 시켜주겠노라며 하나를 알아도 열을 아는 것처럼 떠들지도 모른다. 특히 상대가 여성이라면? 훨씬 친절해진 말투로 오바할 것이다. 이게 다 맨스플레인이자 위계적인 남성문화 아니던가. 위스키가 숙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3년이고, 보통 8년에서 12년 이상 숙성시킨 뒤에 세상밖으로 나온다. 그 정도 시간은 들여야 맛과 향이 난다. 사람도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맨스플레인: 상대가(특히 여성) 주제에 대해 모를 것이라 가정하고 무턱대고 설명하거나 가르치려는 태도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정민


내가 익어가는 과정은 잘 숙성된 위스키를 마시며 오랜 시간을 들여 잘 연구된 페미니즘 서적을 읽는 것이다. 이것이 꼭 여자친구가 아니어도 좋고(26화), 우울할 수 있는 연말을 잘 건너갈 돌봄의 방법이자(27화), 남다른 새해 계획이기도 하다(28화). 내가 사랑하는 장면들을 더 많이 누리기 위해(29화), 취향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또 그 취향을 나눌 사람들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꿈꾼다. 그날이 올 때까지, 2024년에도 사랑, 취향 그리고 위스키는 또 한해 향을 더하며 익어갈 것이다.


@pexels.com / cottonbro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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