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소 정기연재
남과 여, 흑백 말고 컬러풀 무지개 세상
by 이한
🔸16화 <남과 여, 흑백 말고 컬러풀 무지개 세상> by 이한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일은 손에 안 잡히고 나가서 놀자니 밀린 마감이 마음에 걸려 옴짝달싹 못할 때, 머리나 식혀볼까 하여 슬쩍 짧은 영상의 세계(쇼츠, 릴스 등)로 도피해버린다. ‘공부가 따로 있나, 이게 트렌드 공부지’라는 적당한 변명과 1분 내외의 짧은 시간은 죄책감까지도 가볍게 만들어주는 기분이다. 그렇게 넋을 놓고 보다보면 어느새 한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 아뿔싸 정신 차려야하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저린 팔을 바꾸려 옆으로 돌아누울 뿐이다. 그러다 맞닥뜨린 영상이 제법 웃기다. 한 남성이 빨대로 음료를 마시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게이”라는 목소리가 계시처럼 울려퍼지고, 남성은 화들짝 놀라며 쥬스를 컵에 옮겨 담는다. 빨대로 음료를 마시는 게, ‘게이 같은 행동’으로 여겨질까봐 놀란 마음을 추스린다. 이 시리즈가 한 두개가 아니다. 셀카를 찍으려다가 핸드폰을 내던지고, 예쁜 꽃을 보고 감탄하다가도 무심한 척 돌아선다. 심지어 다리를 꼬는 것도, 맥주 대신 콜라를 마시는 것도 ‘게이 같은 짓’으로 여겨질까봐 두려워 하는 남성들이 한 트럭이다. 깔깔거리고 웃다가 내 목소리가 너무 가느다랗지는 않았나 점검해본다.
@인스타그램 릴스 중에서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
이 우습고 하찮은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주변 남성에게 이 모습은 같이 피식거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또 동시에 뜨끔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게이 같다’는 말은 가장 큰 금기이자 멸시고 도발이다. 단적으로 여자 학교와 남자 학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스킨십의 유무다. 여자 학교에서는 팔짱을 끼고 다니거나 손을 잡고 머리를 빗어주는 등 스킨십이 일상적이고 자연스럽다. 남자 학교에서는? 주먹다짐 하거나 멱살 잡는 일 아니고서야 스킨십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스킨십은 커녕 친구가 우울해 보이거나 심지어 울고 있어도 달래기보다 “우냐?”고 조롱하면서 동네방네 소문내는 게 이른바 ‘국룰’이다.
전설의 '우냐?' 짤 @야매토끼
대체 왜 이럴까? ‘남자다움’은 마치 뜬구름 같아서, 우리 사회에 실재해 영향을 미치면서도 막상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때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선택은 바로 변두리에 울타리를 세우고 남자답지 않은 것들을 쫓아낸 뒤, 열심히 손가락질 하는 것이다. 조롱에 능숙할수록 사람들이 그의 남성성을 의심할 여지가 줄어든다고 믿기 때문에 연신 그 울타리를 세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게이’는 그 울타리 밖에 사는 괴물같은 존재다. 남자이기에 다른 존재를 성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으면서 그 대상이 여성이 아닌 다른 남성을 향할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 그래서 자기 자신을 ‘여성화’되게끔 만들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 그래서 더 호시탐탐 물으며 점검한다.
“너 게이냐?”
흑과 백의 갑갑한 울타리 너머의 세상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한때는 열심히 울타리를 치던 사람이었다.
처음 그 울타리가 들어서던 날을 기억한다. 어린시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허물없이 지내던 동갑내기 동성친구와 나란히 손을 잡고 등하교 하던 어느 날, 주변에서 귀엽고 보기 좋다며 깔깔거리던 목소리가 그 행동을 더는 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었다. 교복을 입은 뒤로는 더 확실해졌다. 또래 사이에서 학교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여성스럽게 보이거나 게이 같다는 말을 듣느니 차라리 밝히는 남자애가 되는 게 편했다. 그렇게 내 안에 세워진 울타리는 공고한 벽이 되어 나를 좁은 세상에 가두었다.
해외봉사로 파견 나간 태국의 한 학교에서 @이한
한동안 잊고 있던 ‘울타리 밖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건, 태국에 해외봉사를 다녀오면서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훨씬 더 열려 있었고, 그것을 증명하듯 내가 간 시골 학교에도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선생님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당연하고 평화로운지 내 안에 자리한 뿌리깊은 편견이 마냥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균열 간 울타리는 이후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제서야 내 주변 다양한 정체성의 친구들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는 왜 연애 안해?”라는 말이 왜 그토록 불편했는지 알게됐고, 이성 간 관계를 얼마나 협소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으면서 퀴어 친구가 생겼고 이성 간에도 깊은 우정을 맺을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특히 나의 사랑관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트였다.
‘100% 이성애자’라는 환상을 넘어 무지개빛 세상으로
앞서 언급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를 당연하게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세상에 진짜 100% 이성애자라는 게 가능할까? 과연 그 ‘이성애’가 말하는 게 무엇일까? 한 번은 친구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만약 애인이 성별 정정 수술(성전환)을 한다면 어떤 마음일 것 같은지 물었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봐도, 그런들 갑자기 사랑이 짜게 식을 것 같지 같았다. 애초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게, 단지 성기의 모양이나 성별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한편으로 우리가 그간 사랑을 ‘육체적 관계’만으로 너무 협소하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이어가면서, 우정과 사랑의 작위적인 구분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실로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고도로 발달한 우정은 사랑과 구분할 수 없다” 고 느낀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애써 ‘이성애자’라고 확정지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태국 같이 우리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다른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사회적 차별과 폭력적인 시선이 더 적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을까? 아니, 당장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남성이 나타나서 (딱히 그럴 이유는 없겠지만) 나를 적극적으로 유혹하고 나선다면? 그때도 변치 않을 ‘자신(?)’이 있을까? 10년 후에는? 20~30년 후에는?
@Pixabay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얼마나 더 지금의 정체성으로 살아갈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다른 정체성을 찾아 낼 수도 있고 늙어 죽을 때까지 이성애자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런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거나 부질없어지지 않는다. 당장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고자 자꾸 시도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어떤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운동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일단 물어보자. ‘남자다움’과 ‘남자답지 않음’으로 양분되는 흑백의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자. 한계를 딛고 넘어선 당신에게, 총천연색 무지개빛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얼룩소 정기연재
남과 여, 흑백 말고 컬러풀 무지개 세상
by 이한
🔸16화 <남과 여, 흑백 말고 컬러풀 무지개 세상> by 이한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일은 손에 안 잡히고 나가서 놀자니 밀린 마감이 마음에 걸려 옴짝달싹 못할 때, 머리나 식혀볼까 하여 슬쩍 짧은 영상의 세계(쇼츠, 릴스 등)로 도피해버린다. ‘공부가 따로 있나, 이게 트렌드 공부지’라는 적당한 변명과 1분 내외의 짧은 시간은 죄책감까지도 가볍게 만들어주는 기분이다. 그렇게 넋을 놓고 보다보면 어느새 한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 아뿔싸 정신 차려야하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저린 팔을 바꾸려 옆으로 돌아누울 뿐이다. 그러다 맞닥뜨린 영상이 제법 웃기다. 한 남성이 빨대로 음료를 마시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게이”라는 목소리가 계시처럼 울려퍼지고, 남성은 화들짝 놀라며 쥬스를 컵에 옮겨 담는다. 빨대로 음료를 마시는 게, ‘게이 같은 행동’으로 여겨질까봐 놀란 마음을 추스린다. 이 시리즈가 한 두개가 아니다. 셀카를 찍으려다가 핸드폰을 내던지고, 예쁜 꽃을 보고 감탄하다가도 무심한 척 돌아선다. 심지어 다리를 꼬는 것도, 맥주 대신 콜라를 마시는 것도 ‘게이 같은 짓’으로 여겨질까봐 두려워 하는 남성들이 한 트럭이다. 깔깔거리고 웃다가 내 목소리가 너무 가느다랗지는 않았나 점검해본다.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
이 우습고 하찮은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주변 남성에게 이 모습은 같이 피식거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또 동시에 뜨끔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게이 같다’는 말은 가장 큰 금기이자 멸시고 도발이다. 단적으로 여자 학교와 남자 학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스킨십의 유무다. 여자 학교에서는 팔짱을 끼고 다니거나 손을 잡고 머리를 빗어주는 등 스킨십이 일상적이고 자연스럽다. 남자 학교에서는? 주먹다짐 하거나 멱살 잡는 일 아니고서야 스킨십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스킨십은 커녕 친구가 우울해 보이거나 심지어 울고 있어도 달래기보다 “우냐?”고 조롱하면서 동네방네 소문내는 게 이른바 ‘국룰’이다.
대체 왜 이럴까? ‘남자다움’은 마치 뜬구름 같아서, 우리 사회에 실재해 영향을 미치면서도 막상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때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선택은 바로 변두리에 울타리를 세우고 남자답지 않은 것들을 쫓아낸 뒤, 열심히 손가락질 하는 것이다. 조롱에 능숙할수록 사람들이 그의 남성성을 의심할 여지가 줄어든다고 믿기 때문에 연신 그 울타리를 세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게이’는 그 울타리 밖에 사는 괴물같은 존재다. 남자이기에 다른 존재를 성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으면서 그 대상이 여성이 아닌 다른 남성을 향할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 그래서 자기 자신을 ‘여성화’되게끔 만들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 그래서 더 호시탐탐 물으며 점검한다.
“너 게이냐?”
흑과 백의 갑갑한 울타리 너머의 세상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한때는 열심히 울타리를 치던 사람이었다.
처음 그 울타리가 들어서던 날을 기억한다. 어린시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허물없이 지내던 동갑내기 동성친구와 나란히 손을 잡고 등하교 하던 어느 날, 주변에서 귀엽고 보기 좋다며 깔깔거리던 목소리가 그 행동을 더는 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었다. 교복을 입은 뒤로는 더 확실해졌다. 또래 사이에서 학교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여성스럽게 보이거나 게이 같다는 말을 듣느니 차라리 밝히는 남자애가 되는 게 편했다. 그렇게 내 안에 세워진 울타리는 공고한 벽이 되어 나를 좁은 세상에 가두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울타리 밖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건, 태국에 해외봉사를 다녀오면서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훨씬 더 열려 있었고, 그것을 증명하듯 내가 간 시골 학교에도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선생님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당연하고 평화로운지 내 안에 자리한 뿌리깊은 편견이 마냥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균열 간 울타리는 이후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제서야 내 주변 다양한 정체성의 친구들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는 왜 연애 안해?”라는 말이 왜 그토록 불편했는지 알게됐고, 이성 간 관계를 얼마나 협소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으면서 퀴어 친구가 생겼고 이성 간에도 깊은 우정을 맺을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특히 나의 사랑관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트였다.
‘100% 이성애자’라는 환상을 넘어 무지개빛 세상으로
앞서 언급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를 당연하게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세상에 진짜 100% 이성애자라는 게 가능할까? 과연 그 ‘이성애’가 말하는 게 무엇일까? 한 번은 친구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만약 애인이 성별 정정 수술(성전환)을 한다면 어떤 마음일 것 같은지 물었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봐도, 그런들 갑자기 사랑이 짜게 식을 것 같지 같았다. 애초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게, 단지 성기의 모양이나 성별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한편으로 우리가 그간 사랑을 ‘육체적 관계’만으로 너무 협소하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이어가면서, 우정과 사랑의 작위적인 구분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실로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고도로 발달한 우정은 사랑과 구분할 수 없다” 고 느낀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애써 ‘이성애자’라고 확정지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태국 같이 우리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다른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사회적 차별과 폭력적인 시선이 더 적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을까? 아니, 당장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남성이 나타나서 (딱히 그럴 이유는 없겠지만) 나를 적극적으로 유혹하고 나선다면? 그때도 변치 않을 ‘자신(?)’이 있을까? 10년 후에는? 20~30년 후에는?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얼마나 더 지금의 정체성으로 살아갈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다른 정체성을 찾아 낼 수도 있고 늙어 죽을 때까지 이성애자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런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거나 부질없어지지 않는다. 당장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고자 자꾸 시도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어떤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운동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일단 물어보자. ‘남자다움’과 ‘남자답지 않음’으로 양분되는 흑백의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자. 한계를 딛고 넘어선 당신에게, 총천연색 무지개빛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