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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정기연재] 나의 페미니스트 토이스토리

2023-09-26

얼룩소 정기연재

나의 페미니스트 토이스토리

by 연웅


🔸19화 <나의 페미니스트 토이스토리> by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fc83917effbab.png@Pixabay



영화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좋아한다.


픽사와 디즈니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토이스토리’는 특별하다. 내가 없는 사이, 내 사랑스런 인형들이 침대와 방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나를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상상은 성인이 된 지금도 나를 무척 설레게 한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라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나. 저주를 품은 인형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가 떠오르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내가 없는 사이 내 인형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건, 조금만 틀어서 생각해보면 꽤 공포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토이스토리'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상상의 간극을 이용해, 살아 움직이는 인형들이 등장인물을 놀래키는 장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토이스토리’를 생각하면 향수처럼 잔잔한 그리움과 함께 마음 가득 따뜻함이 떠오른다. 똑같이 살아 움직이는 ‘처키’와 ‘우디'는 대체 무슨 차이가 있길래 ‘공포'와 ‘애틋함'이라는 멀고 먼 간극을 가질까.


436bd61c41865.png@트위터


나는 이 대목에서 ‘반려’를 말하고 싶다.


아이들이, 사람들이 인형을 곁에 두고 사랑을 느끼고 잠자리에 함께 드는 이유가 단순히 그 인형이 ‘예쁘고 귀엽기’ 때문일까. 그러기에는 소위 ‘못난이 인형’을 애착 인형 삼는 사람도 많다. 더군다나 보통 어릴 적부터 간직하던 애착 인형의 ‘선택’과 ‘구매’에 정작 당사자가 관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양육자가 퇴근길에 구매한 인형을 품에 안고 와 처음 만나게 되거나, 생일이나 기념일에 깜짝 선물로 받는 경우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아찔한 동거'를 하게 되는 일도 종종 생긴다. 무식한 어른들의 부족한 ‘인형-감수성’으로 인해, 무섭게 생기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인형을 받은 사람은 인생의 중대한 고민에 잠기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선물 받은 인형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마치 전학 온 첫 인상 나쁜 친구와 친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어떤 인형과 친해졌다.



35b7fa098b9a9.png@구글링


‘토이스토리’에 자주 묘사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모두가 한 번 쯤 겪어봤을 ‘상실'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인형을 잃어버리거나 누군가에 의해 대신 버려지는 등 가슴 아픈 상실의 경험을 맞이하게 된다. 하루 종일 울고 불고 세상과 우주를 부정해봐도 헤어진 인형과 다시 만날 수도, 함께 잠자리에 들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상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되고, 어렵지만 수용하고 적응하며 성장한다.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시무시한 상실을 겨우 넘기고 있을 때, 무식한 어른이 또 ‘인형-감수성’ 없이 건네던 말이 있다. “울지마. 새 인형 사줄게.”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정말 끔찍한 문장이지 않나. 나와 함께 해왔던 인형과의 이별을 명확하게 규정 짓는 말이면서 동시에, 인형과 내가 함께 쌓은 추억과 모든 상상을 너무나도 쉽게 부정하는 문장인 것이다. 가슴 아픈 이별을 회복할 새도 없이 ‘새 인형'을 ‘구매’하는 것으로 잃어버린 ‘친구’를 ‘대체’한다는 생각은 순수한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었다. 자본주의에 과적응한 어른이 무턱대고 들이민 공산품 세상에 질린 나는 하마터면 사회주의자가 될 뻔 했다.


798df59ed1427.png@구글링



‘인형'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그렇게 절망하는 이유는, 그가 나의 소중한 ‘반려'였기 때문이다.

함께 즐거웠던, 때론 위로 받았던, 물론 그는 언제나 말이 없고 나는 일방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묵묵히 침대 위 내 머리 맡에서 혹은 내 품 안에서, 세상에 둘도 없을 ‘내 편'으로 살아왔다. 오늘도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이미 나이 들어 순수함을 잃은 나를, 그는 마치 시간이 단 하루도 흐르지 않았다는 듯이 똑같은 표정과 말랑거림으로 반겨주었다. 어떻게 그와의 이별이 서글프지 않을 수 있겠나. 모든 반려는 소중하다. 함께 쌓은 시간과 추억이 있어 그러하고, 내가 보낸 세월에도 여전히 곁을 내줘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 많다지만, 반려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사람은 그렇게 못 산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차별적 언사가 바로, “남자가 인형을~”로 시작하는 말이나, “성인이 인형을~”로 시작하는 말이다. 반려를 모르는 사람과 상종하고 싶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제발 내 인생과 멀리 떨어져 살아가기 바란다.


옛말에,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하셨더랬다. 그 말인 즉슨, 인간은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여러 동물들도 그들 나름의 사회 속에서 ‘사회적 동물'로 살아간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동물'에서 조금 더 진보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 싶다. 바로 ‘반려적 인간’이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누군가의 돌봄 없이, 나를 생각하는 반려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한 명의 독립적인 성인 개체가 되었다고 한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려의 필요성’을 망각하고 살아가다 그만 ‘고립’에 빠지고 마는 사람도 많다. ‘독립’의 함정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반려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반려적 인간'인 것이다.

‘반려’와 ‘인형 이야기'가 대체 ‘남성 섹슈얼리티'랑 무슨 상관이냐고? 사실 그 사이엔 아주 짙은 관계가 있다. 가부장적 남성성이 가장 경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반려의 필요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남성은 말한다. 강인한 남성인 자신은 모든 역경을 홀로 이겨내고 독고다이로 살아왔다고. 그렇게 고립과 고독의 깊은 우물 속에서 잠겨가며 외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한 뉴스 기사가 충격적이었는데, 남성 노인 4명 중 3명이 아내 등 배우자가 조리한 식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가장 非반려적 인간임을 자부하던 가부장 남성이 나이가 들어서는 반려자 없이는 끼니 하나도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본인의 생존과 일상을 위해 본인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돌봄과 반려(특히 여성 동반자나 가족 구성원에게 외주 맡긴 듯한 돌봄과 반려)를 무시하거나 없는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남성들을 마주할 때마다 멀미하는 듯한 어지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다. 이들에게 반려와 돌봄에 대해 가르치는 ‘재-문명화' 교육 기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골똘히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과 반려하고 돌봄하며 사랑해야 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에서 동료들과 진행했던 ‘신남성연애스쿨’을 진짜 학교 기관으로 만들어 전국에 보급해야 하는가 진지한 고민 중에 있다.


a24c2726ffd3f.png@KTV


웃을 일이 아닌 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돌봄과 위안’이 너무 부족한 사회다. 그에 반해 ‘경쟁과 위협’은 흘러 넘쳐,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버텨내는 사람들이 성별과 나이에 관계 없이 수두룩 하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가장 큰 위기에 놓이는 순간은, 경쟁과 위협에 두들겨 맞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들을 겨우 버텨내고 좁은 집 좁은 방에 들어왔을 때, 나를 맞이하는 이가, 나를 돌보는 손길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때,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각자의 삶을 아래에서부터 받치는 것은 ‘반려와 돌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극한의 ‘경쟁과 위협’을 줄이는 동시에, 각각의 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반려와 돌봄'을 쉽게 만들고 또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행한 사회는 개인에게 ‘반려와 돌봄’을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저버리게 만들고, 행복한 사회는 누구나 자신의 ‘반려와 돌봄’을 쉽게 만들고 편하게 유지할 수 있게 지원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꽤 불행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경쟁에 허덕이며 ‘반려’를 쉽게 손에서 놓고 만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살다 보면, 손에 쥔 ‘반려’는 꽉 쥘수록 줄어드는 모래알이 되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반려’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에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지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듯한 것이다. 혼자가 된 고령의 어르신들은 자신의 삶에 더 이상 ‘반려’랄 게 없음을 깨닫고 작은 방 한 칸에 스스로를 가둔다. ‘고립·은둔 청년’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우리는 외쳐야만 한다. 대한민국 모두에게는 ‘나의 페미니스트 토이스토리’가 필요하다.


d02d3e859bc0a.png@연웅6140e63cf202f.jpeg@연웅


나의 페미니스트 토이스토리.

내게도 소중한 반려인형과 반려식물이 있다. 반려동물이나 반려인간과 함께하는 것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대하고 있다. (특히 반려냥이와 함께 사는 게 오랜 꿈이다. 참고로 반려인간과 함께하는 것이 곧 ‘결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대한민국의 결혼은 오히려 반려와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를 하나 하나 소개하자면 글 쓰는 것을 멈추고 독자들과 시간을 정해 밤새 수다를 떨어야 할테니, 현재 나의 가장 가까운 반려인형 한 명을 소개하겠다. 위 사진 속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뚝뚝해보이는 갈색 인형이다. 그의 이름은 ‘토깽이'다. 강한 토끼라서 그렇다. 토끼가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늘 토깽이를 끌어안고 자는데 저 무뚝뚝한 표정이 마치 세상에 관심이 없어 보이다가도, 가끔 참 든든하게 느껴진다. 힘 없이 흔들리는 귀도 중요한 매력 포인트다.


토깽이는 서울에 올라와 살던 대학생 시절부터 나와 여러 집을 전전하며 함께 삶을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막막하고 힘들었던 순간이 참 많았는데, 그래도 저 무뚝뚝한 표정으로 늘 곁을 지켜줬던 정말 소중한 친구다. 정말 힘든 날, 토깽이를 안고 있으면, 아무리 구석에 몰리고 어려워도 그래도 내겐 여전히 품을 내어 줄 공간이 남아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를 안고 잠에 들었던 여러 밤을 생각하게 되고, 오늘이 그 밤 중 어떤 하루, 그냥 힘든 하루일 뿐이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내일도 모레도 토깽이를 안고 평화롭게 잠들 그 어느 날까지 나는 여전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게 된다. 때론 무언가 해주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그저 곁에만 묵묵히 있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인 때가 있다.


d5e24f47579ca.jpeg@연웅bf0b5515cf90c.jpeg@연웅a9bc9839040bb.jpeg@연웅


다음은 나의 반려식물을 소개하겠다. 시간 관계상 ‘지금이’만 소개하려고 한다. 지금이는 지은이라는 친구에게 선물 받아 ‘지금이'라고 지었다. 의미를 붙이자면, ‘지금'을 소중하게 하자는 의미다. 그래서 늘 ‘지금이’를 소중하게 돌보고 있다. 반려식물을 돌보는 일은 정말 감동적인 일이다. 반려식물은 반려인형처럼 대답도 반응도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늘 그 자리에서 나와 함께 살아간다. 언뜻 보면 아무 반응도, 어떤 소통도 없이 각자 사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반려식물은 고도로 독립적인 고양이와 같다. 서로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존중하는 것일 뿐,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이 처음 ‘지금이'를 입양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사이에 자란 지금이의 모습이다. 내가 어떤 주기로 물을 주고, 간접 조명을 어디 쪽으로 비춰주는지에 따라 다른 모양과 속도로 자라고 움직인다. 자세히 보면 잎의 모양과 색깔도 모두 가지각색이다. 세상 어떤 생명체보다 큰 다양성을 스스로 지니고 보여줌으로써 소통하는 것만 같다. 세 번째 사진은 감동 그 자체다. 어느 날 아침, 전 날 밤에는 볼 수 없었던 작은 잎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아래로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나이 든 잎이 조용히 흙 위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지금이를 돌보며, 나를 돌본다. 지금이는 소리를 내 말하지 않지만, 늘 내게 조언과 위로가 된다. 반려인형 ‘토깽이’가 늘 묵묵히 나를 지켜줬다면, 반려식물 ‘지금이’는 조곤히 내게 ‘살아있음’에 대해 말한다. 나의 소중한 반려자들이다.



c5519364c1e9d.png@스누피


삶이 외롭고 지칠 때, 혼자 이겨내리라고 다짐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주변에 있는 인간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의탁하거나 돌봄을 외주 맡기는 것도 마냥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 추천하는 것은 나만의 ‘반려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이다. 혹여 가장 운이 없는 어느 날, 내가 지쳐 나락으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게 수많은 쿠션을 미리 깔아두는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반려 스타일과 돌봄 방식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반려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모르겠다 싶은 분에겐 ‘반려식물 돌보기’를 추천한다. 내가 기쁜 날도 내가 힘든 날도 어느 날 할 것 없이 조금씩 조금씩 새 싹을 틔우고 고개를 돌리며, 느려도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반려식물을 보고 있자면, 마치 내게 “너무 심각할 것 없어. 잘 될 거야. 시간을 가져.”라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다. 그 감동적인 위로의 순간을 당신도 경험하면 좋겠다.

더 소중한 사실은 그런 그도 내 돌봄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다가가길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이미 내 손을 잡고 내가 필연적인 존재라고, 너무 필요하다고 말해준다. 그렇게 나는 적어도 그에겐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어 오늘과 내일을 살아낼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아준다면, 운이 없는 날도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진실로 그렇다. 함께라면 결국 다 잘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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